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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원파록에대한 대종회 의 견해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07.11.12
첨부파일0
추천수
1
조회수
3089
내용
금번 대동보에 원파록 수록에 관한 건.

☞ 제안설명 : 본 건은 차씨들이 대전 뿌리 공원에 그들의 유래비를 세우고 그 후 그들의 족보를 발간하면서 그 내용 중 우리 문화 류씨의 성과 우리 시조의 성휘(姓諱) 및 사실(史實)을 함부로 날조하였음.

이에 우리 대종회에서 수차에 걸쳐 대책회의를 하였으며 금년1월 18일 대동보편수위원회에서 원파록 등의 등재에 관하여 논의된 바 있었음. 당시 회의 결과 차씨들이 우리 문화 류씨의 성과 우리 시조의 성휘(姓諱) 및 사실(史實)을 함부로 날조하는 발단의 근원으로 인용되는 원파록과 잘못 전해온 류, 차 관계에 대한 기록을 문헌록에 등재하지 않는 것으로 하였으나 당시 소수이지만 그에 대하여 반론도 있어 차후 더 논의하기로 하였음. 그런데 이에 대한 명확한 입장을 확정해주길 요청하는 분들이 있는바 본 안건을 상정함.

2005.11.24 문화 류씨 추계 정기총회

회의 자료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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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 파 록

1. 본 문건은 기사보(1689년)의 문헌에 수록된 것으로 현존하는 원파록 중 가장 오래전의 것임.

2. 기사보 이전 족보인 가정보(1562년)에는 원파록이 없었음.

왕수긍(王受兢) - 황제(皇帝)의 손자는 전욱(顓頊)이요, 전욱(顓頊)의 손자는 하우(夏禹)요, 하우(夏禹)의 13세손은 공갑(孔甲)이요, 공갑(孔甲)의 아우는 조명(祖明)이다. 조명(祖明)이 유루(劉累)와 더불어 용을 길들이는 것을 함께 배웠는데, 유루는 공갑이 다시 용의 젓갈(젓갈 해:醢)을 구하는 것을 두렵게 여기고 도망하였다. 조명이 함께 동해로 피하다가 중간에 일토산(日土山) 언덕에 이르러 살았다. 수긍(受兢)은 조명의 후예인데 기자(箕子)가 동국에 봉하던 처음에 팔조(八條)의 계훈을 가르치고자 할 때 풍토가 다름이 있어 나라의 존경하는 분을 얻은 연후에 가히 행하리라 하니, 나라 사람들이 수긍(受兢)을 천거하였다. 사사(士師)라 이름하여 왕자를 가르치고 백성의 풍속을 순화 하도록 하는 한편 왕씨(王氏) 성(姓)을 하사하였다. 대개 그 사는 곳이 일토(日土)의 땅이라 하여 그 방점을 빗기어 그은 것이다.

지(贄) - 수긍(受兢)의 12세손이다.

렴(廉) - 지(贄)의 45세손인데 기준 때에 상주국을 삼았다. 살펴 보건데 왕수긍은 기자(箕子)를 섬기고 수긍의 50세손 렴은 기준(箕準)을 섬겼다고 이른다. 시준은 기자의 41세손이다. 그 사이에 3대의 대수가 의심이 되는바, 기록에 착오가 있는 것 같다.

차무일(車无一) - 초명(初名)은 몽(蒙)으로 렴(廉)의 13세손인데 신라(新羅) 시조(始祖)를 섬겨 시중(侍中)이 되었다. 당시에 일토초가(日土草家)가 왕이 된다는 참설(讖說)이 있었는데 화(禍)가 미칠까 두려워 일곱째아들 림(琳)과 더불어 자취를 감추고 지리산으로 들어가 십여 년을 도를 닦았다. 또 이인(異人)의 훈계를 받아 변성(變姓)한 것이 세 차례인데 처음에는 동서로 두 획을 더하여 전(田)자로 하고, 다음에 획을 상하로 꿰뚤어 신(申)으로 하고, 세 번째 천지(天地) 양획을 더하여 차(車)로 하여 무일(無一)이라 개명하였으며, 림(琳)을 신을(神乙)이라 개명하였다. 제 3자 식시(式時)의 후손에 왕건(王建)이 고려태조가 되었는데 그 참설이 이 파에 응하였다. 일본(一本)에 이르되 무일은 수긍의 16세손이요, 신을은 무일의 제 3자 식시(式時)의 일곱째 아들이다.

신을(神乙) - 초명(初名)은 림(琳)이다. 부기(夫起) - 대상(大相). 유전(惟典) - 승상(丞相).

무정(戊正) - 사공(司空). 개수(介修) - 사공(司空). 복(復) - 대상(大相).

조영(祖英) - 주국(柱國). 괄(适) - 대상(大相). 인상(仁相) - 내주(內奏).

갑승(甲承) - 승상(丞相). 자개(子開) - 승상(丞相). 무기(武奇) - 사공(司空).

승각(升閣) - 승상(丞相). 공내(公乃) - 통독(統督). 보전(輔傳) - 집주(執奏).

제능(濟能) - 신라(新羅) 미추왕(味鄒王) 때 승상(승상)인데, 어느 곳에는 능(能)이 장(張)이라 되어 있다.

등국(登國) - 아간(阿干). 은보(殷甫) - 승상(丞相), 어느 곳에서는 보(甫)가 부(夫)로 되어있다.

연광(延廣) - 아간(阿干). 휘만(徽曼) - 승상(丞相), 어느 곳에는 휘(徽)가 미(微)로 되어있다.

지(智) - 이찬(伊湌), 어느 곳에는 지(智)가 아(阿)라고 되어있다. 온백(溫伯) - 승상(丞相).

순(楯) - 승상(丞相)인데 어느 곳에는 순(楯)이 욱(栯)이라 되어있다.

엄(渰) - 상대등(上大等). 루한(婁漢) - 사공(司空). 순계(盾階) - 대상(大相).

단식(段式) - 승상(丞相), 어느 곳에는 단(段)이 개(改)라 되어있다. 헌(憲) - 승상(丞相).

도강(渡康) - 전의(典儀). 검부(儉夫) - 승상(丞相).

건신(建申) - 승상(丞相), 어느 곳에는 신(申)이 신(信)이라고 되어있다.

류색(柳穡) - 초휘(初諱)는 승색(承穡)인데, 신라 애장왕(哀莊王) 때 대상(大相)이 되었다. 상대등 언승(彦昇)이 왕을 시해하고 스스로 왕에 오르니, 대상이 그 아들 사공 공숙(恭叔)과 더불어 복수를 꾀하다가 일이 탄로 나자 도망하여 숨었다. 그의 할아버지인 승상 검부(儉夫)의 처 양씨(楊氏) 성(姓)을 따서 요동(遼東)의 좌익위사(左翼衛士)가 되었더니, 또 외숙 김반전(金盤傳)이 고발함에 도망하여 유주(儒州)의 부오가(富筽家)에 들어가 고용하며 성명을 바꿔 류색(柳穡)이라 하고, 공숙(恭叔)은 류숙(柳淑)이라고 하여 그로써 유주에 살게 되었으니 지금의 문화(文化) 고을이다. 어느 곳에는 색(穡)이 백(栢)이라 되어있고, 또 다른 곳에는 환(桓)이라 되어 있다.

숙(淑) - 초휘(初諱)는 공숙(恭叔)이니 사공(司空)이다. 어느 곳에는 숙(淑)이 항(恒)이라 되어있다.

진부(振阜). 무선(茂先) - 해평산장(海平山長). 보림(普林) - 월흑산장(月黑山長).

차달(車達)

※ 참고로 대승공 류차달에 대한 기록을 살펴보면

1) 고려사 열전 중 류공권 편

2) 장경공 류 돈의 묘지명(1349년)

3) 정신공 류 승의 장녀로 안동인 권 보의 처 류씨 묘지명(1344년) 등에서 그 기록을 찾을 수 있다.

이 외에 가정보(1562년) 등의 기록은 물론 기사보에 실린 원파록의 내용에도 대승공의 성휘(姓諱)는 분명 류차달(柳車達)로 되어있다. 우리도 시조 이전의 역사를 모르는데 소위 설원기에 응제시를 썼다는 타성씨인 이예장(李禮長)이 우리 선대 역사를 그렇게 정확히 알고 있다는 것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는가.

2005.11.24 문화 류씨 추계 정기총회


문화 류씨의 올바른 인식을 촉구함


이 세상 온갖 사물 가운데 소위 생명체로서 자기의 참된 가치를 모른다면 이는 자신의 존재를 모르는 무생물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인간을 만물의 영장이라 일컫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생명력을 가진 그 어느 동물보다 뛰어난 지각을 소유한데서 이른 것입니다. 그런데 그 지각을 갖춘 인간으로서 고루한 아집, 또는 체면, 이해에 얽매어 바르게 생각하지 않고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를 간간이 볼 수 있습니다.

이는 남남과의 사이에 있어서도 안 될 문제이지만 더욱이 혈통으로 나뉜 종족 간에야 천부당만부당한 일로써 우리 종친 모두 이 점을 깊이 깨우쳐 올바른 길로 나아가야 하겠습니다.

먼저 이 글을 씀에 있어서 일언반구라도 자타가 공인하는 이른 바, 공가문헌에 의하여 기술함을 밝히는 한편 송구하오나 서술의 편의상 선조 및 선현의 휘함에 부득이 경칭을 생략하였음을 널리 양해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우리 문화 류씨는 고려 개국에 공을 세운 대승공 류차달을 시조로 받드는 후손으로서 한반도의 황해도 문화 고을을 관향으로 쓰는 씨족입니다. 시조 이후 고려 조선을 거쳐 지금에 이르기 1000여 년 동안 많은 명경과 석학을 배출하여 국가와 휴척을 함께 한 명벌로서 소위 삼한갑족으로 일컬어 왔습니다. 이렇듯 세상에서 우리 류씨를 삼한갑족으로 일컬은 이유는 조선조에 유명한 여러 외사씨의 류씨평을 살펴보면 이해하고 남음이 있을 줄 믿습니다.

초간 권문해는 대동운부군옥에 동한 명벌 20성 중에 류씨를 9위에 넣었고, 우암 송시열은 이천부사 류공경소의 묘갈명에 ⌜문화 류씨는 고려 대승공 이후로 규조(圭組)가 성황하여 다른 씨족이 바래지 못하였다.⌟하였으며, 도곡 이의현은 도곡총설에 조선 12대성 가운데 우리 류씨를 7위에 넣었습니다. 익익재 홍봉한 등이 간행한 증보문헌비고에는 ⌜고려 사인(士人)에 족망상고로 류. 최. 김. 이 4성이 귀종(貴種)이라.⌟하여 고려 4대 명족 중에 류씨를 으뜸으로 꼽았고, 연려실 이긍익은 연려실기술에서 ⌜우리나라 족보의 효시는 가정년간에 간행된 문화류씨세보이다.⌟라 하였으며, 그 뿐만 아니라 명나라 학자 우신행은 ⌜동국의 류씨는 진나라의 왕씨 사씨와 당나라의 최씨 노씨에 내리지 않는다.⌟ 하였으니 국내외를 막론하고 우리 류씨의 성망이 얼마나 울연했던가를 가히 잠작 할 수 있습니다.

이상 열거한 것은 선세의 세덕을 자랑하고자 함이 아니라 오직 뒷사람으로 하여금 그 세덕을 확실히 알고 긍지를 갖도록 하고자 하는 뜻에서입니다.

근년에 들어 우리 대종회에서는 이제까지 잘못 전해져 온 류씨와 차씨와의 관계에 대하여 내외의 많은 문헌을 수집, 탐구하는 한편 사학에 조예가 깊은 학자들의 자문을 얻어 그 진실과 허위를 자세히 기록, 종보 ⌜유주춘추⌟를 통해서, 또는 대/소 회의를 통해서 홍보하고 아울러 설득도 하였습니다.

그로 말미암아 경향 각처 많은 종친들이 거의 이해하고 있습니다만 아직까지도 고착된 구습과 편벽한 사고를 탈피하지 못하고 수수방관하는 종친이 계심으로 이 종친들의 이해를 돕고자 지속적으로 탐구하여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이에 지면관계상 이제까지 발표된 내용은 생략하고, 혹 그 가운데 미비한 점을 약간 보완함과 아울러 새로 발견된 내용 등 몇 가지를 들어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 차문에서 차씨는 중국 고대 황제 헌원씨의 후예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에 중국에도 필시 그 후예인 차씨가 있을 것으로 추측되어 그 유래를 알아보고자 중국에서도 최고 자전으로 일컫는 소위 중문대자전의 차자 편을 두루 고람한 바, 그 끝에 ⌜姓也, 通志 氏族略, 車氏, 嬀姓, 漢武帝時, 丞相田千秋, 以年老, 詔乘小車, 出入省中, 時號車丞相, 子孫因氏焉, 又後魏疎屬曰車裩氏, 改爲車氏. - 이를 변역하여 이르건대, 성이다. 통지 씨족략에 차씨는 규성(嬀姓:陳姓)이다. 한(漢) 무제(武帝) 때 승상 전천추가 연로하여 황제의 칙명으로 작은 수례를 타고 성중을 출입함으로써 당시 사람들이 차승상이라 일컬었는데 그 자손들이 그로 인하여 성씨를 삼았다. 또 후위 때 그 왕실의 먼 족속 중에 차곤(車裩) 씨라 이르는 분이 차곤을 고쳐서 차씨로 하였다.⌟ 이상이 차씨의 유래입니다.

이와 같이 황제 헌원씨의 후예라는 다소간 여하한 언급도 일체 발견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렇다면 황제 헌원씨가 다스린 본국 중국에는 그 후예인 차씨가 없는데, 수 천리 먼 이국, 더군다나 수천년 오랜 후세에 무슨 근거로 우리나라 차씨들만이 유독 황제의 후예라 자칭하는지 전혀 이해 할 수 없습니다.

둘째, 소위 차원부설원기의 기록을 보면 조선 초기의 정도전, 함부림, 하륜, 조영규 등 사얼(四孼)이 역적으로 모함하여 차원부 외 족친 60여명이 참살되는 멸족지화를 당하였다 운운하였습니다.

소위 사얼로 일컫는 그들이 차문 선대 어느 누구와 혼인관계가 있었는지? 이는 오직 차문의 주장일 뿐, 신빙할 만한 문헌의 기록은 없습니다. 또한 그 말처럼 역적으로 몰렸다 치더라도 극형은 역모로 몰린 당사자와 그 자녀 및 형제에 한하였고 근친에 대해서는 거의 유배 정도로 그쳤음이 여러 문헌에 나타나는데 그 많은 족친이 동시에 참살되었다는 것은 도저히 믿을 수 없는 허구한 낭설에 불과합니다.

셋째, 차원부가 왕, 차 류 3성의 족보를 만들어 해주 신광사에 그 보판을 저장해 두었는데 앞서 이른 바, 사얼들이 자신들의 출생의 치부를 은폐하기 위하여 그 보판을 불질러 실전하였다 운운하고 있습니다.

소위 족보를 편간하려면 먼저 수단 자료를 받아야 하고 다음 편집 및 교정을 거쳐 인쇄, 배포 등 복잡한 과정이 있는데 한 성씨도 아니고 세 성씨의 모든 업무를 혼자 맡아 처리, 간행하였다는 것인지? 아무튼 한 성씨에 한 분씩이라도 참여해야 마땅한 일이고, 또한 족보는 물론 고려와 조선조 1000여 년 동안 어느 한 문헌에라도 그 사실이 나타나야 할 것 입니다. 더욱이 왕, 차, 류 3성이 동원분파의 혈연이라면 무슨 철천지한이 있기에 수백 년 전부터 지금까지 간행된 족보에 일자척구도 그런 언급이 없는지? 아무리 긍정적으로 이해하려 해도 믿어지지 않고 상식으로 통하지 않는 어불성설입니다.

그리고 앞서 연려실기술에 이른 바, 문화류씨세보는 곧 조선 명종 17년 임술(壬戌:1562년)에 간행된 세칭 가정보입니다. 그 가정보를 비롯하여 지금까지 역대 족보에 시조는 대승공 류차달, 2세는 좌윤공 류효금으로 한결같이 기록되어 있을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근래 차문에서 그들의 선조 차효전이 대승공의 아들이라 주장하는 한편 고려개국공신이니, 연안군이니 운운하는데 다만 차문의 족보 외에는 어떤 공가문헌에도 그런 기록이 없습니다. 대승공 류차달의 아들이 아닐 뿐만 아니라, 역사적으로 공인하는 고려 개국공신 어느 누구도 군호가 전하지 않는데 유독 차효전에게만 봉군되었는지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막상 사실로 가정할지라도 연안이란 지명은 고려 개국 후 300년이 훨씬 지나 충선왕 때에 이르러 비로서 생겼는데 300여년 후에 변경 될 지명을 미리 알고 그 고을 이름을 따서 봉군했다면 이해 할 수 있는 일입니까? 이는 실로 날조된 차원부설원기와 허황한 강남보원파록을 빙자한 과대 망상적 억설의 결과입니다.

끝으로 부연하건대 우리 문화 류문과 차문 간에 종씨 운운의 발단은 조선말기 사대주의 사상에 젖은 일부 선인들이 수보시 문헌편에 그 날조된 설원기와 허황된 원파록의 일부 내용을 게재하여 고대 중국의 전설상의 제왕인 황제 헌원씨의 후예로 행세하려 한데서 비롯되었습니다. 그리고 종친회의 조직은 일제로부터 해방된 후 반상과 귀천의 구분이 무너지고 소위 민주주의를 표방한 득표 작전의 선거문화로 인하여 시작되었습니다. 이러한 사상과 문화에 편승한 일부 선인들의 과오는 물론 무의식간에 선인들의 사행을 무조건 맹신맹종 한 오늘날 우리들의 과오와 우매함 또한 형언 할 수 없음을 솔직히 시인합니다.

이 같은 허위와 날조로 엮어진 지난날의 역사를 진실인 양 포장하고 계획적으로 시도한 차문은 우리 종사에 대한 참언망동으로 말미암아 대내외로 겪는 명예적 실추와 정신적 피해가 이루 헤아릴 수 없습니다. 아무튼 사실이 확연히 드러난 이상 마냥 우유부단하고 망설일 수만은 없습니다. 이제 차씨와의 관계를 확실히 파악하고 그 본질을 명확히 인식하여 우리 문화 류씨 종중의 문헌을 올바로 정립, 후세에 전하는데 적극 동참해 주시길 간절히 촉구하면서 이만 줄입니다
文化柳氏大宗會長 浩 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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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ryu하곡

    귀중한 감사합니다.

    2 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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